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우리의 영예군인들은 정말 기특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당이 꽃방석에 앉히고 존대해야 할 귀중한 혁명동지로 아끼고 사랑하며 내세워주는 영예군인들,그들속에서는 조국과 인민,사회와 집단을 위해 좋은 일을 찾아하는 아름다운 소행이 높이 발휘되고있다.
모란봉구역 긴마을1동에는 이른새벽이면 한쪽 어깨에 삽과 괭이가 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가 저녁때가 되면 그 한쪽 어깨가 패이도록 파철을 가득 채운 배낭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로인이 있다.
올해 70살 난 영예군인 강영기동무이다.
40대의 한창나이에 군사임무수행중 심한 부상을 입고 영예군인이 된 어제날의 대좌 강영기동무,그가 이 길을 걷기 시작한것은 다박솔초소를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의 모습을 뜨거운 눈물속에 우러른 주체84(1995)년 1월부터였다.
심한 부상을 당한 불편한 몸이였으나 어제날의 대좌는 조국수호의 길에 나서신 위대한 장군님의 모습을 우러르며 자기 심장에 스스로 량심의 명령,보답의 명령을 내린것이였다.
그때부터 그는 이른아침부터 저녁어스름이 질 때까지 시안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파철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하루에 고작 1~2kg이 되는 쇠붙이들을 모아들이기가 일쑤였다.차츰 20~30kg의 파철을 수집하는 날이 늘어났다.이렇게 첫해에 700여kg이 넘는 파철을 수집한 강영기동무는 그 다음해부터는 800kg이상,2002년부터는 한해에 1t이 넘는 파철을 수집하군 했다.
사실 성성한 사람들도 저어하는 땅파기와 콩크리트까기를 하여 쇠쪼각들을 얻어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철근 몇개를 얻기 위해 제몸의 몇배 되는 콩크리트덩어리를 깨뜨려야 했고 하나의 쇠붙이를 캐내기 위해 무릎깊이까지 흙을 파낼 때가 드문했다.힘에 부친 일이였다.
하지만 콩크리트가 묻은 철근이나 흙이 게발린 쇠쪼각들이 배낭을 채울 때면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것처럼 쑤시던 모진 아픔을 가뭇없이 잊은듯 강영기동무의 얼굴에는 이름못할 미소가 어리군 했다.
그도 할아버지였다.그라고 하여 어찌 다른 로인들처럼 손자,손녀의 재롱을 받아주는 락을 누리며 여생을 즐기고싶지 않았으랴.매일과 같이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처럼 이른새벽이면 꼭꼭 집을 나서군 하는 강영기동무에게 안해와 자식들이 누가 지켜보는 일도 아닌데 좀 쉬염쉬염 하라고 몇번이나 간청한지 모른다.하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더 중한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기스스로 자기 심장에 내린 보답의 명령,한생토록 수행하여야 할 임무였다.
파철더미가 날을 따라 높아지던 2012년 4월 어느날 새벽 5시가 되자 어김없이 집을 나서는 남편의 배낭을 거들어주며 한선숙녀성은 초소로 나가던 당신을 바래주던 그때가 생각난다고 추억깊은 말을 건넸다.
나이가 들수록 정이 깊어지는 안해의 말에 강영기동무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순간 안해의 어깨너머로 방안벽에 걸려있는 옛 군복의 대좌견장과 많은 훈장,메달들이 눈에 밟혀왔다.
군사복무시절의 군복을 보며 강영기동무는 《그럼 군복입고 임무수행에 분투하던 그때의 그 정신,그 기백이야 어디 가겠소.》 하며 성한 오른쪽 어깨에 멘 배낭을 추스르고는 힘을 주어 걸음을 내짚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스스로 나라의 부강번영을 위한 좋은 일을 찾아하는 강영기동무에게 그해 5월 은정깊은 감사를 보내주시였다.
누가 보건말건,평가해주건말건 스스로 내린 량심의 명령수행의 길을 걷는 한 영예군인에게 안겨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은정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는 뜻깊은 2012년에 1t 540여kg의 파철을 수집하였다.지난해에는 1t 200여kg,올해에는 지난 10월초까지 1t 200kg이 훨씬 넘는 파철을 모아 강철전선에 보내주었다.
김정일애국주의로 가슴 불태우며 강영기동무는 지난 근 20년동안 16t이 넘는 많은 량의 파철을 모아 부강조국건설의 무쇠기둥을 억세게 다지는데 이바지하였다.
창전거리건설이 마감고비에서 힘있게 다그쳐지던 두해전 3월초 어느날 혁명적군인정신을 높이 발휘하며 날마다 기적과 위훈을 창조해나가는 군인건설자들의 전투현장에 한 영예군인과 그의 안해가 지성어린 원호물자들을 안고 찾아왔다.
《분대장동지》,《분대장동지》 하며 오랜만에 만난 자기 분대장을 대하듯 저마끔 두팔을 부여잡는 군인건설자들의 손이며 어깨를 어루만지는 나이지숙한 영예군인,
군인건설자들에게 에워싸인채 더없는 행복감에 휩싸여있는 그는 모란봉구역 개선동에서 사는 영예군인 표창덕동무였다.
표창덕동무와 그의 안해 리명애동무는 20년이 넘도록 원군길을 이어오고있었다.
부대적으로 쇠소리 쟁쟁 나는 결패있는 분대장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표창덕동무가 영예군인이 된것은 20여년전이였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자기 한몸을 서슴없이 내대고 하반신이 마비된 불구의 몸이 된 그는 가슴이 아팠다.조국의 대지를 이제는 제발로 짚을수 없다는 생각보다 이제 더는 전우들과 함께 초소를 지킬수 없게 되였다는 안타까움으로 하여 그는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절망감에 사로잡혀있지 않았다.몸은 성성하지 못하다 해도 정신만은 불구가 될수 없었다.
당과 조국이 안겨준 영예군인이라는 그 고귀한 칭호를 가슴에 새기고 군사복무시절의 분대장의 모습으로 한생을 살리라 속다짐한 그에게 인물곱고 마음씨고운 처녀 리명애동무가 한생의 길동무로 나섰다.내 심장속에는 항상 전우들,정든 초소가 있다고 늘 외우는 표창덕동무에게 그는 자기 마음도 합쳐 잊지 못할 그 전우들을 적극 위해주자고 다정히 속삭이였다.
1990년 5월 만사람의 축복속에 행복한 가정을 이룬 그들부부는 그로부터 얼마후 성의껏 마련한 많은 원호물자들을 가지고 통일거리건설장에서 위훈떨치고있는 군인건설자들을 찾았다.
두줄로 늘어서서 표창덕분대장동지와 신부 리명애동지를 축하한다고 하며 축복해주던 군인건설자들에게 그들부부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를 받드는 심정으로 원군사업을 벌려갈것을 약속했다.
그때부터 그들부부의 원군길은 해마다 이어졌다.어려웠던 고난의 행군,강행군시기에도,강성국가건설이 힘있게 벌어지는 오늘에도 표창덕동무는 안해와 함께 여러가지 원호물자들을 한점두점 성의껏 마련하여 초소의 병사들에게 보내주었다.
사실 불편한 몸으로 여러곳을 다니면서 병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원호물자들을 마련하는것은 생각과 같지 않았다.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원호물자를 받아안고 기뻐할 병사들을 그려보았다.
그래서 안해와 함께 더더욱 극성스럽게 원군의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주체96(2007)년 8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여러가지 좋은 일을 많이 한 특류영예군인 표창덕동무와 그의 안해 리명애동무에게 감사를 보내주시는 은정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분에 넘치는 감사를 받아안은 표창덕동무와 리명애동무는 더욱 분발하여 성의껏 장만한 원호물자들을 병사들에게 보내주었다.
표창덕동무와 그의 가정의 뜨거운 지성이 담긴 원호물자들을 받을 때마다 병사들은 분대장동지의 당부를 잊지 않고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관철에 언제나 앞장서겠다는 편지를 보내오군 하였다.
어느해인가부터 병사들은 원군을 어길수 없는 임무로 여기고 원군사업에 온갖 지성을 다 바쳐가는 표창덕동무에게 원군열성자란 호칭을 더 붙여 원군열성자 우리 분대장동지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병사들의 세대는 여러번 바뀌였으나 오늘도 병사들은 표창덕동무를 두고 선배들처럼 원군열성자 우리 분대장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