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사람이 한생을 가장 빛나게 살고 값있게 보내자면 반드시 생에 대한 혁명적관점을 가지고 혁명투쟁에 몸바쳐나서야 합니다.》
은파군 강안협동농장 제11작업반 농장원이였던 김봉칠동무는 지난 5월 27일 새벽 포전에서 숨을 거두었다.중병을 앓는 몸이였지만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사회주의수호전의 제1제대 제1선참호를 떠나지 않은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있다.
자신을 깡그리 바쳐 그는 이 땅에 무엇을 남겼는가.
뜨락또르운전수 박광명동무는 작업반부문당비서 김봉칠동무가 초불처럼 태운 생의 마지막목격자이다.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뒤돌아보았을 때 부문당비서동무는 삽을 틀어쥔채로 논판에 쓰러져있었습니다.》
이날 새벽도 그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포전으로 향했다.뽀얀 안개속에서 바둑판같은 논판들이 봄꿈을 꾸듯 고요히 잠들고있었다.
《오늘도 첫새벽은 우리가 맞누만요.》
논두렁에 맺힌 이슬을 차며 박광명동무가 하는 말이였다.
《그야 응당하지.논써레치기가 모내기의 선행공정이 아니요.》
김봉칠동무의 대답은 박광명동무의 마음에도 들었다.
올해에는 써레치기가 별로 더 잘되였다.어디를 둘러보나 거울같이 매끈한 논판들이였다.이제 논판 하나를 마저 하면 작업반의 써레치기가 예정보다 사흘을 앞당겨 끝나게 될것이였다.
모내기전투를 앞두고 작업반에서는 부문당비서 김봉칠동무가 모내기의 선행공정인 논써레치기와 모뜨기작업을 책임지고 하도록 조직사업을 하였다.그 사실을 알게 된 박광명동무가 김봉칠동무에게 그 몸으로 일없겠는가고 걱정하자 그는 말하였다.
《내가 자진했소.》
1996년부터 10여년간 부락당비서로,작업반장으로 일하여온 김봉칠동무는 병세가 악화되여 몇해동안 농장원으로 일하였다.그러다가 4년전에 제11작업반 부문당비서로 사업하게 되였다.제11작업반은 리소재지와 멀리 떨어져있는 단위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단합시키는데서는 김봉칠동무만 한 적임자가 없어 농장당조직에서는 그에게 건강을 우선적으로 돌보면서 작업반장의 뒤를 잘 보아주라고 당부하였던것이다.
(쌀은 곧 사회주의이다.조국의 운명이 판가름되는 농업전선을 지켜선 농장원들이 제구실을 잘하도록 하자면 부문당비서인 내가 실천적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런 생각을 안고 김봉칠동무는 어렵고 힘든 일에 앞장섰다.진거름을 모으러 갈 때에도 제일 먼 지역을 도맡아나갔고 김을 매도 다른 사람이 한고랑을 맬 때 두고랑,세고랑을 매군 하였다.
쓰러지면 어쩌겠는가고 안해가 안타까와하고 작업반장이며 반원들이 부문당비서동무는 곁에 있기만 해도 힘이 된다고 하였지만 그는 자기 위치를 변함없이 대오의 앞장에 정하였다.
그런 김봉칠동무였기에 이번 모내기전투를 앞두고 그 선행공정을 스스로 책임지고 나선것이였다.써레치기를 담당한 뜨락또르운전수 박광명동무와 함께 매일같이 새벽길을 함께 걷는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박광명동무가 뜨락또르를 몰아가자 김봉칠동무는 삽을 들고 그뒤를 따랐다.써레날이 흘린 흙밥들을 고루 펴면서 논판이 높아진데는 깎고 낮아진데는 춰올려 면을 반듯하게 맞추어나가는데 심장이 지그시 아파났다.
그는 심장부위를 주먹으로 힘껏 두드렸다.조금만 참아주었으면,조금만 더… 하고 생각하는듯 그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어렸다.
뜨락또르를 몰아오던 박광명동무가 본것은 이 광경이였다.
혹시 하는 생각으로 가속답판을 냅다 밟으려던 그는 김봉칠동무가 다시 평온한 기색으로 손바닥을 땅과 수평이 되게 펴고 좌우로 천천히 흔드는 바람에 그만두었다.그것은 써레치기의 질을 보장하라는 약속된 신호였던것이다.
《써레치기의 질이자 모내기의 질이요.》
그가 하던 이 말이 생각나 박광명동무는 운전대를 더욱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김봉칠동무의 곁을 지나는데 그의 얼굴에 땀방울이 내돋은것이 보였다.
그의 허리춤에서는 손전지가 데룽거렸다.논써레치기작업에 필요한 삽과 깊은 밤 어둠을 밝히는 손전지는 김봉칠동무가 늘 몸에서 떼여놓지 않는것이였다.그 손전지에 눈길이 미치자 박광명동무는 어제도 부문당비서가 모뜨기작업을 하느라 자정이 넘도록 일하였다는 생각이 났다.
(써레치기가 끝나면 어떻게 하나 쉬게 해야지 안되겠어.)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였다.뒤에서 철써덕 하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박광명동무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부문당비서동무!》
김봉칠동무는 이렇게 갔다.…
(거짓말이다!)
그가 포전에서 뜻밖에 숨을 거둔 사실을 알았을 때 작업반원들은 누구나 이렇게 부르짖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이 포전,저 포전을 씨엉씨엉 넘나들며 모내기에 떨쳐나선 농장원들을 적극 고무한 그였다.그가 슬며시 쥐여준 알사탕이 주머니속에 그냥 남아있는데,어제 낮 휴식참에 그가 건드러지게 뽑던 《분조농사 꽃이 피네》노래의 가락이 아직도 귀가에 쟁쟁한데 그 불같은 심장이 고동을 멈추었다는것이 정녕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흙묻은 삽을 총창처럼 비껴쥔채 논판에 쓰러진 남편을 두고 그의 안해가 터치는 오열이 작업반원들의 심장을 때렸다.
《모내기를 끝내고는 치료를 받겠다고 하더니 이게 웬일이예요.》
논판에서 삽을 틀어쥐고 생을 마친 김봉칠동무,
그를 바라보는 농장원들의 마음속에 못 잊을 하나의 모습이 떠올랐다.가렬한 전호에서 팔다리가 부서지자 턱으로 중기압철을 누르며 불사신처럼 싸운 조군실영웅의 모습이였다.
모진 아픔에 시달리면서도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사회주의결사수호의 전초선을 굳건히 지킨 김봉칠동무의 정신세계를 한목숨 다 바쳐 조국의 고지를 사수한 영웅들의 불굴의 넋과 어찌 다르다고 할수 있으랴.
총포성은 비록 울리지 않아도 조국의 운명,사회주의운명이 판가름되는 농업전선에서 나라의 쌀독을 채우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생명까지도 내대여야 한다는 김봉칠부문당비서의 마지막호소를 작업반원들은 뜨거운 눈물속에 듣고있었다.
올해 53살인 김봉칠동무는 19년전에 가족과 함께 농촌으로 자원진출한 사람이다.
스무해전 위대한 수령님께서 뜻밖에 서거하시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크나큰 충격속에 자기 인생을 돌이켜본것처럼 김봉칠동무도 생각이 많았다.그의 가슴에 아프게 새겨진것은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지팽이를 짚으시며 험한 포전길을 걸으신 어버이수령님의 모습이였다.이 땅에 무르익는 한포기의 곡식,한알의 낟알에 수령님의 심혈과 로고가 깃든줄을 깊이 생각지 않고 무심히 밥술을 들군 한 자신이 민망스러웠다.
스스로 자신을 꾸짖던 김봉칠동무는 어느날 안해인 김용애동무에게 농촌에 나가 농사를 짓고싶은 의향을 내비쳤다.
황해북도인민위원회에서 로동자로 일하는 남편과 7살 난 딸,4살 난 아들과 함께 도소재지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있던 김용애동무는 소스라쳐 놀랐다.하지만 늘 무거운 마음을 안고사는 남편의 모습에서 그 말이 진정임을 깨달을수 있었다.
이렇게 되여 그들은 은파군 강안리로 이사를 왔다.
김용애동무는 농촌생활에 익숙되기 힘들어하였다.그런 그와 자식들을 앉혀놓고 김봉칠동무는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장군님께서 농장을 찾으시여 주신 고귀한 지침을 자자구구 들려주었고 때로는 온 가족을 데리고 농장의 곳곳을 돌아보며 력사의 발자취들을 심장에 새기도록 하였다.
김봉칠동무는 겉모양부터 안속까지 실농군의 모습이 되기 위하여 주체농법을 열심히 학습하고 농사일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는 곡식이 무르익는 사회주의협동벌을 사랑하였을뿐아니라 그 벌을 가꾸는 농장원들을 친혈육처럼 위하였다.
그가 작업반초급일군으로 일한 제6작업반과 제14작업반,제11작업반의 농장원들은 김봉칠동무가 자기들을 위해 바친 뜨거운 진정을 오늘도 잊지 못하고있다.
올해 봄 김봉칠동무네 집터밭에서는 올품종무우가 실하게 자랐다.많은 농장원들이 그 무우들을 보면서 부러워하였다.
어느날 저녁 김봉칠동무는 안해를 불렀다.
《여보,무우가을을 하기요.》
《벌써요?》
안해가 아쉬운듯 되물었으나 김봉칠동무는 큼직한 무우 하나를 뽑아들고 말하였다.
《이만하면 먹을만 하지.작업반원들이 맛을 보라고 나누어주기요.》
그리하여 터밭의 무우는 말끔히 뽑혔다.집집마다 나누어주고 토방우에 한묶음의 무우가 댕그렇게 남았을 때에야 김봉칠동무는 《우리도 맛을 보기요.》라고 헌헌하게 말하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그는 작업반원들의 가정방문길에 나서군 하였다.반찬은 무엇을 해먹는가,군대나간 아들에게서 편지가 자주 오는가,앓는 사람은 없는가 하는것이 그의 일상적인 관심사였다.
매일같이 이어진 순회길에서 그는 작업반원들이 터놓는 만단사연을 단 한번도 흘려듣지도 귀찮아하지도 않았으며 기쁨도 아픔도 함께 나누면서 작업반원들을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주인의 본분을 다하는 길에 굳게 묶어세웠다.그의 불같은 진정과 노력에 의하여 많은 농장원들이 농사에 진심을 바치는 실농군의 풍모를 갖추었고 여러명이 조선로동당원으로,모범선동원으로 자라났다.
《김봉칠동무는 정말 우리 작업반의 어머니였습니다.》
작업반장 김강선동무가 젖어드는 목소리로 추억을 더듬었다.김봉칠동무의 건강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사람은 그였다.하지만 그는 그것을 입밖에 낼수 없었다.김봉칠동무가 절대로 말을 내지 말아달라고 절절히 당부하였던것이다.
《올해농사를 잘 지으면 내 병은 저절로 낫는다니까.》
이러며 그는 풍요한 가을을 그려보는듯 땀젖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군 하였다.
우리는 작업반명부를 펼쳤다.맨우에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김봉칠》
그 이름이 오늘도 작업반명부에 있듯이 그의 고결한 삶은 작업반원들의 심장속에 소중히 남아 풍요한 가을에로,더 많은 알곡생산에로 힘있게 부르고있다.
김봉칠동무의 빛나는 삶과 더불어 제11작업반원들은 당과 조국에 충정의 보고를 드리는 풍요한 가을에로 힘차게 달려갈것이다.올해만이 아니라 년년이 줄기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