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대원수님들을 혁명의 수령,삶의 태양으로 높이 모시였던 우리 당과 인민의 충직한 아들인 김일동지가 서거한 때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멀리도 흐르고 혁명은 아득히 전진하였다.
그러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선군조선의 태양으로 높이 모신 우리 군대와 인민의 심장은 오늘도 항일혁명선렬들의 정신과 넋으로 세차게 고동치고있다.
민족해방,계급해방,인간해방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 한생을 바쳐 싸워온 견결한 혁명투사,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과 당과 국가,새 사회건설에 불멸의 공적을 쌓은 우리 당과 국가의 저명한 활동가였던 김일동지의 한생은 오늘도 혁명전사의 인생관에 대한 고귀한 진리를 가르쳐주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항일혁명투사들의 충실성의 모범을 본받도록 하여야 합니다.》
수령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백절불굴의 신념,수령을 따르는 길에 모든 승리와 영광이 있다는 억척불변의 의지,이것이 김일동지의 일생에 세워진 기둥이였다.
당의 유일적령도체계를 철저히 세워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고 인민의 꿈과 리상을 실현하기 위한 오늘의 투쟁에서 김일동지의 한생은 우리 군대와 인민이 따라배워야 할 귀중한 본보기로 되고있다.
어느해 여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심한 병을 앓고있는 김일동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며 김일 제1부수상동지는 수령님을 모시고 백두산에서부터 혁명해온 혁명의 원로이라고 그리고 오늘은 수령님과 우리 당을 받드는데서 1번수의 역할을 하고있다고 진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나이가 많지만 우리 당과 혁명에서 김일 제1부수상동지가 차지하고있는 위치는 달리될수 없다고,뭐니뭐니해도 몸을 잘 돌봐야 한다고 가슴뜨겁게 당부하시였다.
당과 수령을 받드는 1번수!
김일동지가 받아안은 이 고귀한 칭호는 당과 수령의 령도체계를 세우는것을 생명선으로 삼고 투쟁하여온 혁명전사에 대한 최상의 정치적평가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태양으로 높이 모시고 혁명의 큰 산들을 넘어오면서 오직 수령님의 안녕과 절대적권위를 옹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온 열혈의 혁명전사 김일동지,
그는 수령의 사상과 령도를 충직하게 받드는 길에 혁명의 승리와 인민의 행복이 있으며 전사의 영광이 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 우리 혁명의 첫 세대였다.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중대정치지도원,련대정치위원으로 성장하였으며 혁명과 건설의 년대들에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10년 함경북도 어랑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나 나라를 빼앗긴 설음을 안고 간도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불우한 식민지청년이였다.
이러한 김일동지가 당과 수령의 믿음속에 우리 조국력사에 커다란 자욱을 새길수 있은것은 그를 어엿한 혁명가로 손잡아 성장시켜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있었기때문이였다.
하기에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과 령도를 충정으로 받들었으며 당사업과 군건설,경제지도의 어느 분야에서나 수령님께서 주신 과업을 막힘없이 수행하였다.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신변안전과 건강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친 수령결사옹위의 전위투사였다.
김일동지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지휘관이였지만 지하공작을 하거나 소부대활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흰쌀과 기장쌀을 넣은 배낭을 메고오군 하였다.
《우리모두 굶어죽어도 사령관동지께만은 절대로 강낭밥과 같은 험한 식사를 대접해드려서는 안되오.우리가 다 이 만리타향에 묻히여 무주고혼이 된다 해도 사령관동지께서만 건강하시면 조선혁명은 살아서 반드시 승리를 보게 되오.》
이것이 김일동지의 좌우명이고 신념이였다.
김일동지는 가렬한 전화의 나날 전선사령부 군사위원으로 사업할 때에도 불비쏟아지는 최전선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안녕을 지켜 김책동지와 함께 밤을 새워 보초근무를 수행하였다.
호위사업은 자기들이 맡겠으니 들어가라고 권하는 호위성원들에게 한 김일동지의 말은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울려주고있다.
《동무들이 알아둘것은 지금 우리는 전선사령관이나 군사위원이 아니라 장군님의 보초병이요.우리는 백두산에서부터 장군님을 지켜온 보초병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장군님의 보초병이란 말이요.그러니 동무들은 우리를 생각할것이 아니라 오직 장군님만을 생각해야 하오.빨리 자기 초소로 돌아가시오.》
하늘의 별이 수천수만이여도 태양을 대신할수 없다는 드팀없는 신념을 지닌 김일동지는 내각 제1부수상으로 사업할 때에도 그 직책을 당과 수령을 옹위하는 제1보초병,제1근위병의 영예로운 직무로 여기고 수령결사옹위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왔다.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로선과 당정책을 깊이 체득하고 수령의 령도체계를 철저히 세운 사상과 신념의 제일전우,제일동지였다.
당과 혁명대오의 사상적일색화는 수령의 령도체계확립을 위한 투쟁의 종자이며 핵이다.
김일동지가 전후 반당종파분자들을 적발분쇄하고 위대한 수령님을 중심으로 하는 당과 인민대중의 통일단결을 강화하는데 적극 이바지할수 있은것은 수령님의 사상과 로선에 정통하였기때문이였다.
주체45(1956)년 4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들이 중요한 정책적문제를 토의할 때에 있은 일이였다.
당과 국가의 요직에 있던 한 반당종파분자가 인민생활문제를 거들며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에 대하여 교활하게 헐뜯었다.그자의 정체가 아직 밝혀지지 않고 그자의 요설이 진속을 숨긴것이여서 누구도 면박을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로선을 신념으로 체득한 김일동지앞에서는 그 요술이 통할수 없었다.
김일동지는 벼락치는듯 한 노성으로 《당신이 무슨 나발을 부오.왜 당신이 요즘 출출해하는 놈처럼 잡소리질이요.》라고 그자의 궤변에 된타격을 가하였다.
김일동지의 추상같은 기상에 그자의 기가 꺾이자 다른 종파분자가 그것은 헛소리가 아니라 군중의 의견이라고 두둔해나섰다.김일동지는 불길이 황황 이는 눈으로 그자를 쏘아보며 《당신도 똑똑히 놀란 말이요.군중은 인민인데 인민은 우리 수령님을 절대지지하고있소.》라고 호되게 답새겼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의 김일동지를 회고하시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이 원만하면서도 원칙성이 강한 사람이였다,그는 나쁜 놈들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그자들에게 제때에 타격을 주어 우리 당과 당정책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운 혁명가였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김일동지는 당과 수령의 구상과 결심을 즉시에 접수하고 현장에서 폭풍처럼 집행해나가는 당정책집행의 제1선 돌격투사였다.
말은 적게 하여도 수령의 구상과 결심을 수령이 정해준 시간에,수령이 요구하는 높이에서 관철해내는 사람이 진실로 당에 충실한 일군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발기와 지휘밑에 전력증산을 위한 전투가 벌어지던 주체65(1976)년이였다.
김일동지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 청천강화력발전소건설장에 전권대표로 파견해줄것을 정중히 제기하고 즉시 현지에 달려나갔다.
김일동지는 당시 불편한 몸이였지만 당과 수령의 결심을 관철하는 길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일선용사의 자리에 정하였다.
하기에 김일동지는 려관이 아니라 현장의 가설건물에 사무실을 정한 다음 당에서 정해준 시간대로 건설일정표를 세우고 야전용전화기로 지령을 주면서 불철주야로 공사를 드세게 밀고나갔다.
건설이 지연되면 지팽이를 짚고 아픈 다리를 끌면서 건설중에 있는 보이라꼭대기에까지 오르며 발전소건설을 앞당기였다.
당에서 준 과업을 완벽하게 집행하자면 발전소정상운영에 필요한 석탄까지 마련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탄차에 모포를 깔고 탄광 갱막장에까지 들어가 탄부들을 석탄증산에로 불러일으키는 김일동지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이런 결사관철의 정신력으로 김일동지는 보이라에 불을 지피고 석탄까지 넉넉히 확보해놓은 다음 평양에 올라와 위대한 장군님께 충정의 보고를 올리였다.
당과 수령의 령도체계는 당과 수령이 맡겨준 과업을 철저히 관철하는 실천속에서 확립된다.
이런 신념을 뼈에 새겼기에 김일동지는 패배주의와 보신주의에 빠져 당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도 그만,인민들이 생활상고충을 겪어도 그만인 일군들을 보면 엄하게 꾸짖으며 전진하는 대오의 앞장에 서도록 채찍질하였다.그리고 당에서 일단 결론한 문제를 흥정하려는 현상,당의 령도업적을 음으로양으로 훼손시키는 현상,당적,계급적원칙에서 탈선하는 현상들에 대하여서는 무서운 맹수가 되고 예리한 검이 되여 무자비하게 쓸어버리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일동무가 없으면 내 오른팔이 없는거나 같다고 하시며 앓지 말고 건강해야 한다고 절절하게 당부하군 하시였다.
참으로 김일동지의 한생은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에게 당의 유일적령도체계를 철저히 확립하려면 어떤 립장과 자세로 살며 투쟁해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모범을 보여주고있다.
수령의 령도를 충정으로 받드는 전사는 수령의 혁명령도사를 교과서로 삼고 살며 일하는것을 긍지와 영예로 여긴다.
김일동지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령도풍모를 가슴에 안고 살던 김일동지는 아래에 내려갈 때면 손에 기름을 묻히고 신발에 흙을 묻히면서 군중과 어울리고 그들의 창발적의견을 듣는것을 습성화하였다.
공장과 농촌에 나갈 때마다 집에서 점심밥을 꾸려가지고 갔으며 끼니때가 되면 공장구내식당이나 농장포전머리에 앉아서 간단히 요기를 하군 하였다.
김일동지가 살던 집은 전후에 지은 낡은 집이여서 해당 부문에서 여러차례 보수하려고 하였다.
그때마다 김일동지는 자기 집은 이만하면 괜찮으니 한삽의 세멘트라도 아껴 인민들의 살림집을 더 많이 지어주라고 하면서 집수리를 미루었다.일군들이 방안에 주단을 깔고 안락의자를 들여놓으려고 하자 인민들의 집에 그런것이 다 차례진 다음 우리 집에도 가져다놓자고 하며 돌려보내였다.
이러한 품성의 밑바탕에는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고결한 풍모를 따라배우려는 전사의 순결한 의리가 깃들어있었다.
김일동지는 당과 수령의 구상과 의도를 관철하는데서 자신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적극적인 실천가,헌신적인 창조자였다.
대고조의 불길이 타오르는 전투장들을 끊임없이 찾으시며 조국의 부강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웅대한 설계도를 펼치시고 인민들의 정신력을 발동하여 거창한 변혁을 안아오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령도를 목격할 때마다 김일동지의 가슴은 절세의 위인들을 모신 긍지와 행복감으로 뭉클 젖어들군 하였다.
하기에 김일동지는 운신하기 힘든 몸을 지팽이에 의지하고 무산과 김철,흥남과 신포 등 전국각지를 다니며 경제사업을 정력적으로 지휘하였다.농사철에는 농촌에 나가 당의 농업정책을 철저히 관철하도록 농업부문 일군들과 근로자들을 불러일으켰고 겨울철 물고기잡이때에는 동해안의 신포지구에 나가 물고기수송조직사업을 틀어쥐고 하였다.또 어느해인가는 북창화력발전소(당시)에 내려가 전력생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식,장군님식으로 전투현장에 내려가 걸린 문제를 풀어주고 군중과 함께 방도를 모색하는 김일동지의 사업작풍은 힘있는 정치사업이였으며 그가 있는 곳마다에서는 혁신의 불길이 타오르고 로력적위훈이 창조되군 하였다.
김일동지는 당과 수령앞에서 무한히 고지식하고 진실하게 량심적으로 살아온 충직한 혁명가였고 참다운 인간이였다.
김일동지는 당조직을 존엄있게 대하고 그에 의거하여 사업하고 생활하는것을 철칙으로 삼아왔다.
김일동지는 운명하기 며칠전에도 불편한 몸이지만 당세포를 찾아가 부주석으로서 경공업을 발전시키고 인민생활을 향상시킬데 대한 당의 의도를 더 잘 받들지 못한 부족점을 비판하였다.그리고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 관철에서 가장 억센 일군이 될 결의를 다지였다.이런 높은 당조직관념을 지녔기에 김일동지는 마지막당생활총화를 한 다음 전화로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에게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잘 모셔달라는 절절한 부탁을 남기였다.
오랜 기간 당과 국가의 높은 직무에서 사업하면서도 자기에게 특전,특혜가 차례지는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은것이 김일동지의 인간됨이였다.
김일동지는 어떤 경우에나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한것이 아니라 동지들과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당과 혁명의 리익을 먼저 생각하였다.
그는 가정혁명화에서도 자신이 1번수가 되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자식들이 간부자식행세를 하지 않도록 엄격히 통제하였고 부모의 그늘밑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충실성과 실력으로 당과 혁명을 받들도록 교양하였다.
이런 그였기에 세도와 관료주의를 반대하여 날카롭게 투쟁하고 그러한 현상들을 뿌리채 뽑아버리기 위한 투쟁의 불을 걸군 하였다.
어떤 사리와 공명도 바라지 않고 언제나 고지식하고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김일동지의 집에는 오래전부터 애용하여온 텔레비죤수상기를 비롯하여 평범한 가정들에서 갖추어놓은것과 같은 가장집물들이 있었을뿐이다.하지만 자손들에게 천만금에도 비기지 못할 재부를 물려주었으니 그것은 당과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이였다.
하기에 김일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어주신 김일이라는 이름에 있는 김자는 우리 수령님을 언제나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뜻이고 일자는 한일자인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있다고 생각하였다.그래서 나는 김일이라는 이름을 한평생 오직 위대한 수령님 한분밖에 모르는 혁명전사의 신념의 표시로 간직하고있다.》라고 자식들에게 자주 말하군 하였다.
이렇듯 김일동지는 자신의 이름에 깃든 어버이수령님의 웅심깊은 뜻을 새기며 당과 수령을 받드는 1번수답게 한생을 빛내여왔다.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심장의 정과 열로 당과 수령을 받들어온 김일동지의 한생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받드는 우리 일군들이 언제나 원수님의 령도풍모를 본받으며 일해나가도록 고무해주고있다.
주체혁명위업계승에 특출한 공적을 쌓은 김일동지를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의 충실성은 천추만대에 길이 빛내여야 할 고귀한 전통이다.
수령에 대한 충정은 수령의 후계자에 대한 충정으로 이어질 때 진실하고 공고한것으로 될수 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백두의 혈통을 받들어나가던 력사의 그 나날에 김일동지는 언제나 그 위업실현의 맨 앞장에 서있었다.
김일동지는 백두광명성탄생을 백두밀림의 구호나무에 쓰던 그때부터 위대한 장군님을 민족의 령도자로,삶의 태양으로 높이 모시고 따른 우리 혁명의 원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하신 때부터 그는 혁명과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눈부신 변혁들을 체험하였다.특히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위업을 줄기차게 밀고나가시는 백두산의 아들이신 위대한 장군님이시야말로 위대한 수령님의 유일한 후계자이시라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하였다.
하기에 그는 온몸을 괴롭히는 병마와 싸우면서 오진우,림춘추동지들과 함께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위대한 장군님을 칭송하는 부피두터운 책들을 저술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김일동지는 백두의 혈통을 꿋꿋이 계승하여야 조선혁명이 승리한다는 확신을 안고 위대한 장군님을 위대한 수령님의 유일한 후계자로 높이 모시는 위업실현의 새벽길을 쉬임없이 걸었다.
주체71(1982)년 2월 15일부 《로동신문》에 우리 나라 보도사상 처음으로 시대와 력사앞에 쌓아올리신 위대한 장군님의 불멸의 업적을 격조높이 칭송한 력사적인 정령이 발표된것도 김일동지가 우리 혁명앞에 쌓은 커다란 공적이다.
수령결사옹위의 1번수로서 백두의 혈통을 굳건히 받들어온 김일동지의 고결한 생애는 위대한 김정은시대에 사는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영원한 충정의 좌표를 가리켜주고있다.
당의 유일적령도체계를 철저히 세우는 여기에 조국의 부강과 인민의 행복,우리모두의 영광이 있다는것이 김일동지의 생의 메아리이다.
살아서도 빛나고 죽어서도 영생하는것이 참된 혁명전사의 삶이다.
당과 수령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온 항일혁명투사들의 숭고한 모범이 있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두리에 천겹만겹의 성새를 이룬 천만군민이 있기에 우리는 최후승리를 반드시 앞당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