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어머님의 한생은 길지 않았지만 어머님은 조국과 인민,시대와 력사앞에 불멸의 업적을 쌓으시고 혁명가로서,인간으로서 한생을 어떻게 살며 투쟁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빛나는 모범을 보여주신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에 젖는 9월이면 나에게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목격한 사실들이 떠오르군 한다.60여년전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체험하였던 일들이 아직 나의 기억속에 생생하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된 광주시의 시민들속에서 정치사업을 활발히 벌리며 녀맹사업을 방조할데 대한 임무가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이였던 나에게 맡겨졌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간고하였다.
기차를 타기도 하고 전선으로 달리는 포차에 앉아 밤새 달리기도 하였는데 미국놈들의 폭격이 너무 심하여 낮에는 적당한 곳을 찾아 대피해있는 경우가 많았다.그 덕에 해방된 남녘땅 인민들을 많이 만날수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우리들모두가 한결같이 느낀것은 그들속에서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흠모의 열기가 대단히 높은것이였다.
서울시민들은 물론이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도 어머님에 대해서 물었고 한가지 사실이라도 더 알고싶어하였다.어머님을 한번도 직접 만나뵙지 못하고 어머님의 한생에 대하여 아는것도 많지 못하였던 나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대학기간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뜨거운 격정과 흥분으로 가슴설레이군 한 나였지만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나의 《재산》에 그들이 만족할리 없었다.
광주시에 도착하여 사업하는 과정에 나는 고진히동지로부터 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는데 그것이 해방지역 인민들과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였다.
태양의 해발이 되시여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과 로선을 결사관철하시고 능숙한 군중정치사업으로 인민들을 조국해방성전에 묶어세우신 어머님의 모범은 나의 삶과 투쟁의 귀감으로 되였고 그것은 곧 정치공작사업의 중요한 내용으로 되였다.
한번은 내가 광주시녀맹위원회 청사에서 진행된 모임에 강사로 출연한적이 있었다.시안의 녀맹일군들과 녀맹원들을 비롯한 많은 녀성들이 참가하였었다.
인민군대원호를 잘할데 대한 연설을 마쳤는데 누구도 움직일념을 하지 않았다.청강자들속에서 누군가 다급히 일어서더니 나를 향해 웨치는 소리와 함께 장내가 술렁거리였다.
존경하는 김정숙녀사께서 백발백중의 명사수이시였다는데 그에 대해서 말해줄것을 요청하였다.
그 녀성의 모습에서 나는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절대로 자리를 뜨지 않을 군중의 의향을 읽을수 있었다.
처음 당하는 일은 아니여서 침착하게 몸가짐을 가지는 나에게 선참으로 떠오른것은 보통강개수공사장에서 뵈온 김정숙어머님의 모습이였다.몸소 질통을 지시고 평양시민들과 함께 공사장에서 일하시던 어머님을 먼발치에서나마 우러르던 일이 금시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언제나 소박한 차림이시였던 어머님,저택에 찾아온 황해도농민이 미처 알아뵙지 못한 일화를 남기신 어머님의 인품에 대하여 청강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나의 목소리도 차츰 젖어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장내는 물을 뿌린듯 하였고 청강자들은 김정숙어머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기보다 온넋으로 빨아들이는듯 하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수령님의 신변안전을 첫자리에 놓으시고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련마하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신 어머님,
어머님께서 수령결사옹위의 총성을 높이 울리신 항일의 전구들과 그 나날에 쌓으신 불멸의 업적에 대하여 전하기에는 나의 언어구사능력이 너무나도 모자랐다.
준엄한 날에나 평범한 날에나 항상 총과 함께 호위장군의 고귀한 한생을 빛내이신 어머님에 대해 들으며 다함없는 흠모의 마음을 표시하고 그이의 서거에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던 청중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며칠 앞둔 9월 22일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미제가 또다시 대병력을 투입하였기에 정세는 매우 엄혹하였다.
점심무렵에 고진히동지를 만났는데 숙연한 눈빛으로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평양에서는 오늘을 어떻게 보내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그의 말에 나도 눈굽이 젖어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이날이 어머님께서 서거하신지 1돐이 되는 날임을 잘 알고있는 우리들이였다.
고진히동지는 엄중한 정세가 조성된 때이지만 소박하게나마 어머님을 추모하는 모임을 가질것을 발기하고 조직사업을 해나갔다.
어머님을 그리며 흠모하는 남녘의 민심이 세차게 굽이친 추모모임은 저녁에 진행되였다.
꽃다발과 화환으로 둘러싼 가운데를 좀 높이고 가장자리에 초불을 켜놓았지만 어머님의 사진을 모시지 못하는것이 정말 아쉬웠다.이때 고진히동지가 품속에서 소중히 간직하였던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서 거기에 정중히 놓는것이였다.
해방된 남녘땅에서 사업할데 대한 과업을 받고 평양을 떠나면서 그는 모란봉에 있는 어머님의 묘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였었다.해방된 고향 제주도에 어머님을 모시고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묘소의 흙 한줌을 제손으로 만든 주머니에 정히 담아 품고온 고진히동지였다.
어머님께서 그처럼 념원하시던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김일성장군님을 더 잘 받들어모시자고 호소하는 고진히동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모임장소에는 격정의 대하가 설레이였다.위대한 녀성혁명가에 대한 그리움과 경모심이 파도치는 뜻깊은 자리였다.
남녘의 이르는 곳마다에 굽이친 어머님에 대한 인민들의 흠모의 마음은 전선원호에로 이어졌다.그리고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인민군대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간고한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주저없이 나서도록 하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내가 체험하였던 사실들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하지만 나는 하나의 물방울에 온 우주가 비낀다는 말을 다시금 상기하고싶다.
20살 꽃나이처녀였던 나와 함께 그때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올랐던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수는 없다.그러나 김정숙어머님을 흠모하여 신념으로 선택한 길에서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들이 보람차고 값높은 삶을 누렸으리라는것만은 당당히 확언할수 있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생애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위대한 혁명가의 고귀한 귀감으로 길이 빛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