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8년전 봄 어느날 신성천철도분국 인평역구내로 려객렬차가 들어섰다.
당시 역의 안내원으로 일하던 안영옥동무는 렬차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친절히 맞이하던중 뜻밖에도 부축을 받으며 내리는 중학시절 동창생인 림하삼동무를 보게 되였다.사람들에게 에워싸여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는 안영옥동무의 마음은 무거웠다.
안영옥동무가 그의 집을 찾은것은 며칠후였다.
《병사시절의 그 정신으로 혁명의 꽃을 아름답게 피워가기 바라요.》
그때부터 안영옥동무가 영예군인을 위해 바친 뜨거운 마음과 지성에 대하여 전하자면 끝이 없다.하루일이 끝나 먼저 찾는 곳이 영예군인의 집이였다.
얼마후 림하삼동무의 가정이 신양군 읍으로 이사를 하여 퍼그나 멀어졌으나 그의 발걸음은 조금도 떠지지 않았다.영예군인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때에도 뜨거운 지성을 기울였고 그가 병으로 앓아누웠을 때에는 먼길을 걸으며 마련한 귀한 약재를 안고 찾기도 하였다.
지난 봄 뜻깊은 건군절을 맞으며 안영옥동무는 영예군인의 집을 찾았다.꽃다발을 안겨주며 성의껏 마련한 생활필수품들을 안겨주는 안영옥동무를 바라보며 림하삼동무는 그날 안영옥동무에게 병사시절처럼 거수경례를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3년전 겨울 어느날 저녁 강동군상업관리소 로동자 홍영희동무의 머리속에서는 우연히 만났던 영예군인 장정철동무의 안해에 대한 생각이 떠날줄 몰랐다.
장정철동무에게는 중학교(당시)동창생인 자기가 꼭 필요하다고,당일군의 자식으로서 영예군인과 일생을 같이하는것은 응당한 본분이라고 하며 영예군인의 안해가 된 그의 높은 정신세계에 머리가 숙어짐을 어쩔수 없었다.홍영희동무의 가슴속에는 자기도 아름다운 삶의 자욱을 새기고싶은 열망이 불타올랐다.
홍영희동무는 이렇게 되여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되는 첫걸음을 떼게 되였다.그에게 있어서 늘 모자라는것은 시간이였다.그런 속에서도 영예군인의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언제 한번 드틴적이 없었다.
영예군인이 군인민병원가까이에 새 살림집을 받았을 때에는 친혈육의 정으로 집꾸리기도 도와주었고 명절날이나 휴식일이면 갖가지 영양식품들과 생활용품들을 안고 그들의 집을 찾았다.그렇게 열세해가 흘렀다.
그 나날들은 조국을 위해 피흘린 영예군인과 그의 안해의 높은 정신세계에 자기를 늘 비추어보며 모든것을 바쳐온 헌신의 날들이였다.
전쟁로병들과 탁아소,유치원아이들의 명랑한 모습과 군에 새로 일떠선 봉사기지,희천발전소건설장을 비롯한 사회주의대건설장들에 비낀 홍영희동무의 헌신의 자욱자욱에는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값높은 삶을 빛내여가려는 아름다운 지향이 맥박치고있다.
지난 11월 4일,
이날도 개천철도국 개천철도합숙 지배인 장금숙동무와 종업원들은 시에서 사는 류병진로인의 집을 찾았다.
그들을 맞이하는 늙은 내외의 눈가에는 고마움의 눈물이 맺혀있었다.얼마전에는 구멍탄을 차에 한가득 싣고와 집창고에 차곡차곡 쌓아주더니 오늘은 겨울용김장남새를 안고 또다시 찾아왔던것이다.
장금숙동무가 전쟁로병인 류병진로인을 알게 된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전이였다.
자기가 받아안은 고마운 사랑과 누려가는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 다시금 돌이켜볼 때 전쟁로병을 위하는것은 자신의 응당한 본분이고 도리이며 우리 사회의 고상한 륜리라는 생각이 그의 가슴에 가득히 차올랐다.
남편 리도현동무를 비롯한 온 가족도 적극 도와나섰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전쟁로병을 위해주는 장금숙동무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만졌다.
이 나날에 그는 개천시 천리길동에서 살고있는 영예군인 김창기동무도 알게 되였다.
장금숙동무는 자기의 소행을 고스란히 묻어두었지만 몇해후에는 종업원들에게 알려지게 되였다.이때부터 전쟁로병과 영예군인을 도와주기 위한 사업은 장금숙동무와 종업원들의 생활의 한부분으로 되였다.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헌신하는것을 생활의 륜리로 간직한 장금숙동무,하나는 전체를 위하여,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서로 돕고 이끄는 우리 사회에서 그의 모습이야말로 평범하면서도 돋보이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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