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을 찾았던 우리는 지난 시기 수많은 력사유물들을 수집하여 나라에 바친 한 부부에 대하여 알게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우리 선조들이 이룩해놓은 민족문화유산을 그저 허무주의적으로 대할것이 아니라 귀중히 여길줄 알아야 합니다.》
리경행,전순옥부부를 찾아 우리의 발길이 닿은 곳은 평안남도 안주시 문봉동 37인민반이였다.
아담한 단층살림집에서 살고있는 리영성이 우리를 반겨맞았다.알고보니 그는 리경행,전순옥부부의 맏아들이였다.
그를 통해 어머니마저 지난 8월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였다.아쉽게도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날수 없었으나 우리의 걸음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는 리영성에게서 그의 부모들의 력사유물수집과정을 자세히 들을수 있었다.
리경행이 일본에서 살 때였다.
그에게는 황금이냐,애국이냐 하는 갈림길에 놓인적이 있었다.
귀국준비를 하던 리경행은 지난 시기 일제에게 략탈당한 우리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일본의 한 민간인의 손에 들어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그는 그 력사유물을 기어이 찾으리라 굳은 결심을 품었다.
이 일로 하여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는것을 잠시 미루지 않으면 안되였다.
주체51(1962)년 6월 가족을 바래고난 리경행은 즉시 일본의 조선력사전문가와 조선관계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우리 나라의 문화재를 추적하기 시작했다.고심어린 노력끝에 그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아악보를 보관하고있는 한 일본인에게 접근하게 되였다.
하지만 돈밖에 모르는 그 일본인은 거액의 돈을 요구하며 좀처럼 그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그래서 리경행은 집과 가산을 판 돈을 주고도 모자라 안해가 결혼기념으로 준 시계와 입었던 양복저고리까지 팔았다.이렇게 되여 그는 끝끝내 조국의 귀중한 문화재를 되찾게 되였다.
이 사실을 안 일본의 한 음악평론가가 그를 찾아왔다.그 평론가는 조선봉건왕조 500여년간의 음악예술사가 기록되여있는 그 자료를 가지고 돈벌이를 하면 거액의 돈을 손에 넣을수 있다고 하면서 조선에 가지 말고 함께 돈벌이를 하자고 꼬드기였다.
결국 리경행은 조국의 재부를 팔아 억만장자가 되느냐 아니면 애국의 신조를 지키느냐 하는 량자택일의 길에 서게 되였다.
그는 그 두 길앞에서 서슴없이 후자의 길을 택하였다.
리경행이 이렇게 치부의 길이 아니라 애국의 길을 택할수 있은것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지난날의 망국노의 설음을 뼈저리게 느꼈기때문이며 조국의 귀중한 문화재가 남의 나라에 있는것을 제 살점이 뜯기운것만큼 가슴아팠기때문이였다.
그래서 그는 물질문화보존협회를 조직하고 우리 나라의 력사유물과 자료를 가지고있는 일본사람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다니며 조국의 귀중한 문화재수집에 온갖 정력을 바치였다.
한번은 일본의 한 학자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한 우두머리가 조선의 많은 유물과 력사자료들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그자는 한때 제국주의일본의 거물로 있다가 국제재판에 의해 A급전범자로 판결된자였다.
리경행은 그자의 수중에 있는 유물과 자료들을 되찾는것을 조국이 자기에게 준 신성한 임무로 간주하였다.
하기에 그는 오랜 력사유물과 자료에 관심을 돌리는 민간단체인 물질문화보존협회 성원의 자격으로 그자와 교제하여 7만권에 달하는 장서를 정리할 기회를 얻게 되였다.이 과정에 그는 귀중한 자료들을 수집할수 있었다.
그 자료들가운데는 일제의 조선침략자료들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자료들도 있었다.
그때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다.
문화재들을 수집하는 나날에 그는 김옥균의 자필로 된 족자와 16세기 률곡 리이의 자필로 된 족자,일제가 작성한 우리 나라 지하자원도 등을 수집할수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커다란 기쁨안고 조국으로 향하였다.
그의 손에는 두개의 트렁크가 들려져있었다.그 트렁크들에는 수천점에 달하는 우리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들어있었다.
비록 부피도 크지 않고 무게도 많지 않은 두개의 트렁크였지만 거기에는 천만금으로도 그 가치를 헤아릴수 없는 리경행의 뜨거운 애국심이 무겁게 실려있었다.
귀국한 후에도 그는 이역땅에서 갖은 천대와 민족적멸시를 당해야만 했던 자기와 가족이 조국의 품에 안겨 무상치료제,무료교육제의 혜택아래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생활하게 된것이 너무도 고마와 안해와 같이 력사유물수집사업을 계속해나갔다.
리경행은 오래동안 로동생활을 하면서 여가에 력사유물발굴수집사업을 중단없이 벌리였다.그는 물론 안해도 전국각지를 메주밟듯 하면서 민가에 묻혀있는 국보적가치를 가지는 력사유물과 력사자료들을 수많이 수집하였다.
하여 리경행,전순옥부부는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80돐에 즈음하여 200여점의 력사유물들을 나라에 바친데 이어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 55돐에도 150여점의 력사유물들을 조국에 기증하였다.
나라에서는 일본에서 살 때나 귀국한 후에나 오직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전통을 빛내일 한마음안고 한생을 력사유물과 력사자료수집사업에 바쳐온 이들부부의 애국적소행을 높이 평가하여 리경행로인에게는 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전순옥녀성에게는 로력훈장을 수여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6(1997)년 3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서 리경행,전순옥부부가 기증한 력사유물자료전시회를 열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전시회장에는 그들이 꾸준한 노력으로 얻어낸 1만 8 000여점의 유물,자료들중에서 수백점이 전시되였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 당의 사랑과 은정은 더해만 갔다.당과 국가에서는 리경행을 전국문화보존부문일군열성자회의에,주체92(2003)년에는 전순옥녀성을 남편을 대신하여 선군시대영웅대회에 불러주었다.
력사의 갈피에는 조국의 명예는 안중에도 없이 오직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들이 력사유물을 팔아 일신의 부귀영화를 추구한 비사들이 적지 않게 기록되여있다.
그러나 개인의 치부와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조국의 고귀한 문화재가 략탈당하고 덧없이 있는것이 가슴아파 력사유물을 지키고 빛내이기 위한 애국의 길에 스스럼없이 나선 사람들이 리경행,전순옥부부였다.
하기에 조국과 인민은 그들의 생을 참된 애국자의 삶이라고 값높이 부르는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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