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8일

우리 민족의 귀중한 력사문화유산-광개토왕릉비

올해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력사문화유산의 하나인 광개토왕릉비가 건립된지 1 600년이 되는 해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민족의 재보이며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광개토왕은 우리 나라 력사에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자랑높았던 고구려의 24대왕이였다.

광개토왕릉비는 광개토왕(374-412,재위기간 391-412)의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공적비이다.지금으로부터 1 600년전인 414년 9월 29일에 건립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의 우리 나라 압록강 만포대안에 옛 모습그대로 그 자리에 서있다.

광개토왕의 이름은 고담덕이며 시호(죽은 다음 주는 호칭)는 나라의 지경을 넓히고 편안하게 한 황제라는 뜻을 가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시호가 보여주는것처럼 고구려의 땅을 크게 넓힌 임금으로서 고구려의 령토확장과 국력배양에서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몸은 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높이 6.34m,너비1.43~1.9m의 크기를 가진 4각형기둥모양으로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력사유적이다.대돌은 화강석이다.

비석에는 1 800자에 가까운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있다.음각한 깊이는 5㎜가량이다.

비석은 전체적으로 웅건한감을 준다.글자 역시 독특하고 웅건한 예서글씨의 명필로서 호방한 고구려사람들의 기상을 보여주고있다.

광개토왕릉비는 아시아의 강대국이였던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떨치듯 매우 크고 웅장할뿐아니라 비문의 내용 또한 특이하고도 풍부한 사료적가치를 가지고있다.

또한 간결하고도 웅장한 문장들로 하여 오래전부터 내외학계의 이목을 끌어왔다.

비문은 3개의 큰 문단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제1단은 서문에 해당된다.《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국가를 창건할 때에 그 연원은 북부여에서 나왔다.추모왕은 천제의 아들이요,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였다.…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고 시작된 비문의 서문은 고구려국가의 탄생과 그 신성함을 높이 구가하였다.이어 력대 왕들의 계승관계를 서술한데 이어 광개토왕의 즉위와 죽음에 대하여 서술하고 그후 산릉(왕릉을 달리 이르는 말)을 쌓고 릉비를 세우게 된 유래를 밝히였다.

제2단에서는 영락5년(395년)부터 영락20년(410년)에 이르는 기간의 광개토왕의 무훈을 편년적으로 서술하였다.마지막 제3단은 수묘인(묘지기)의 수를 출신지별로 렬거하였다.그러면서 광개토왕의 훈시를 인용함으로써 왕이 수묘인제도를 확립하였음을 밝히고있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내용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것은 고구려임금을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인 《천제의 아들》,《황천의 아들》 즉 황제로 불렀다는것과 고구려에서는 임금을 여느 국왕과 다른 황제라는 뜻을 특별히 강조하여 《태왕》으로 불렀다는것을 밝히고있는것이다.주몽이 죽자 하늘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을 내보내여 마중오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비문에는 황제만이 지을수 있다는 년호도 밝혀져있다.영락이라는 년호가 바로 그것이다.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영락이라는 년호를 사용하여 일명 영락태왕이라고 불리웠다.

비문에서 또한 주목되는것은 고구려가 백제와 가야 및 《왜》정벌내용을 서술한 391년(신묘년)기사이다.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크게 휩쓴 고구려-신라를 일방으로 하고 백제-가야-《왜》를 타방으로 한 큰 전쟁에서 고구려는 조선반도의 패권을 틀어쥐고 강력한 군사행동을 벌리였다.그리하여 고구려는 남쪽으로 령토를 크게 넓혔으며 백제-가야-《왜》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지난날 일제군부는 광개토왕릉비의 이 신묘년기사를 가지고 일본 《야마또정권》의 조선식민지지배론이라는 《임나일본부》설을 고창하였다.

1882년경 일본륙군참모본부는 앞으로 다가오는 청일전쟁을 예견하여 수십명의 간첩을 중국관내와 압록강일대에 파견하였다.그것은 청일전쟁을 도발할수 있는 《구실》과 《력사적근거》를 찾기 위한 책동의 한 고리였다.

그러한 가운데 한 포병중위가 압록강대안 집안일대에 은밀히 잠입해있다가 릉비의 탁본 한벌을 얻어서 일본에 가져갔다.간첩이 가져간 릉비의 탁본(사실은 탁본을 모방하여 만든 쌍구본)은 륙군참모본부 모략가들의 대환영을 받았다.

놈들은 조선과 만주침략을 위한 불순한 정치적목적 다시말하여 《야마또정권》이 조선을 식민지지배하였다는 얼토당토않은 반동적《임나일본부》설을 《근거》짓는 비뚤어진 조일관계사를 조작하는데 릉비의 비문을 악용하였다.군사작전을 전문하는 륙군참모본부의 지하밀실에 모인 군인들과 륙군대학의 어용학자들은 릉비의 쌍구본을 이리저리 돌려맞추어 하나의 공식화된 문장을 조작하였다.그것이 신묘년기사였다.《백잔(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조공해왔다.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왔기때문에 (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하였고 동쪽으로 신라를 (회유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읽어야 할 비문내용의 주어를 고구려로부터 《왜》로 바꾸어 《백잔(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조공해왔다.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삼아버렸다.》로 만들어놓은것이다.

일본이 신묘년기사의 주어를 《왜》로 읽으려고 하는것은 순전히 조선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비석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립증》하는 《결정적근거》를 찾을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타산에서부터 출발하였기때문이다.

심지어 일본군부는 광개토왕릉비자체를 일본에 실어가려고 하다가 인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그러한 강도행위를 포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야마또《왜》의 《조선에로의 군사적진출》이라는 판에 박힌 사이비학설은 백수십년동안 일본학계와 언론계를 어지럽히였으며 또 각급 력사교과서들에 광개토왕릉비의 비석사진과 함께 조작된 신묘년기사가 게재됨으로써 《임나일본부》설을 립증하는 《특등자료》로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그릇되게 심어져왔다.따라서 조선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세계적인 비석이 일본사람들에게는 《호태왕비》라고 불리우면서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1억국민의 상식적존재》로 정착되게 되였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실례로 이꾸호샤에서 2012년에 발행한 새로운 중학교력사교과서 《일본의 력사》(30페지)와 지유샤에서 만든 《새로운 력사교과서》(7페지,46페지)에는 광개토왕릉비의 사진과 조작된 신묘년기사가 뻐젓이 게재되여 《임나일본부》설이 고취되고있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력사에서 영걸로 일러온 고구려 광개토왕의 기적비는 있지도 않았던 《야마또정권》의 군사적진출을 증명하는 유적이 아니라 고구려의 강대성과 고구려사람들의 호방한 정신세계,고구려의 령역확장과정 및 당시의 고구려-백제관계,고구려-신라관계,고구려-가야관계,고구려-《왜》관계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년대와 수묘인제도를 통해 본 고구려신분관계 등을 보여주는 둘도 없이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광개토왕릉비는 우리 선조들의 금석문유산중에서 가장 오랜것의 하나로서 비문에 담겨진 귀중한 력사적자료,웅건한 모습과 호탕하고 활달한 글씨와 문장으로 하여 우리 나라는 물론 여러 나라 인민들이 귀중히 여기는 조선민족의 훌륭한 문화유산의 하나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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