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0일

어머니당과 숨결을 같이하는 참된 봉사일군

길주군에 가면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전쟁로병들로부터 친딸,친누이로 불리우고 병사들과 학원원아들로부터는 친어머니로 불리우는 한 녀인이 있다.길주군상업관리소 세거리상점 책임자 김선영동무이다.

그는 지난 기간 우리 당이 사랑하고 내세우고있는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전쟁로병들의 건강과 생활을 친혈육의 정으로 돌봐주기 위한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여왔으며 인민군대원호사업을 비롯하여 사회와 집단을 위한 좋은 일을 스스로 찾아하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이런 사람들은 다 진정한 애국자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가지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였다.그것은 자식많은 부모들은 이래저래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는것이다.

김선영동무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그에게 친자식이라고는 외동딸뿐이다.그러나 그에게는 한식솔처럼 지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그들은 바로 군안의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이다.그들을 위해주느라 어느 하루도 편히 쉬는 날이 없다.

혁명렬사유가족들의 가정에 환자가 생기면 보약을 안고가고 며느리가 생기면 첫날옷감을 마련해가고 영예군인의 가정에 옥동자가 태여나면 애기옷과 미역,산꿀을 안고가고…

이런 그를 보고 어떤 사람들이 자기스스로 걱정거리를 안고사는 사람,남을 위해 자기를 타산없이 바치는 사람이라고 할 때면 김선영동무는 말하군 한다.

하고싶어서 하는 고생은 고생이 아니며 남을 위해 바치는 지성은 덕으로 남는다고.

김선영동무에게는 보물처럼 여기는 책 한권이 있다.지금으로부터 8년전 세거리상점 책임자로 임명되였을 때 김선영동무가 스스로 만든 군안의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에 대한 상품공급일지이다.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였다.혁명을 위하여 한몸을 서슴없이 바친 혁명렬사들의 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을 잘 돌봐주는것을 그들의 선혈이 스민 땅에서 행복을 누리며 자라온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로,도리로 여기였던것이다.

자그마한 상점에서 해마다 계획을 넘쳐 수행하면서 혁명렬사유가족과 영예군인가정들에 대한 상품공급사업을 맡아하는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그러나 그는 타산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는 김금희,김영미동무와 함께 힘을 합쳐 해마다 국가적명절들을 맞으며 군안의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에 대한 상품공급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해나갔다.그들의 건강을 돌봐주고 가정들에서 때없이 제기되는 생활상애로를 풀어주기 위하여 밤낮이 따로 없이 뛰고 또 뛰였다.김선영동무의 집 앞마당에는 전에 없던 큼직한 닭우리,토끼우리가 생겨나고 그가 남모르게 걷는 길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그의 부모형제들도 그를 도와나섰다.

-어떻게 하면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을 기쁘게 해줄것인가.

김선영동무는 늘 이런 생각뿐이였다.

언제인가 영남로동자구에서 살고있는 반일애국렬사유자녀의 집을 찾았던 김선영동무는 그의 집에 낡은 텔레비죤수상기가 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상품공급을 해주는것으로 만족해하였으니… 그리고도 한식솔이라구?!)

이런 생각으로 모대기던 그가 다음날 새 텔레비죤수상기를 안고 찾아왔을 때 조계화로인은 그의 뜨거운 진정앞에 고마움의 눈물만 흘리면서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하지만 그 로인은 그것이 김선영동무가 자기 딸을 시집보낼 때 쓰려고 마련했던것이라는것을 썩 후에야 알게 되였다.

그후에도 김선영동무는 때없이 찾아와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만든 닭곰과 토끼곰도 안겨주고 생활의 구석구석을 돌봐주면서 조계화로인을 기쁘게 해주었다.

어느해 여름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은 쌍룡리에서 살고있는 영예군인 리광혁동무의 집으로 가기로 약속되여있었다.그런데 하루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은 땅속에 잦아드는것만 같았다.그날따라 몸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그런 몸으로 또다시 수십리길을 다녀오자니 어쩐지 지친 몸이 더 아픈것 같았다.

(하루 미룬다고 탓하는 사람도 없겠는데 어떻게 할가?)

이때 딸의 행동을 지켜보던 전쟁로병인 아버지 김종하로인의 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난 그래도 네가 자기 아버지만을 위하는 그런 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구나.》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의 친딸,친누이가 된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것을 다시금 새겨안았다.

그가 이렇게 영예군인의 집을 찾았을 때 집안식구들은 얼마나 반기였던가.우리 누이가 왔다고,우리 책임자가 왔다고 하면서 영예군인과 그의 부모들이 혈육보다 더 뜨겁게 대해줄 때 그는 저도모르게 코마루가 찡해짐을 금할수 없었다.

김선영동무와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사이의 혈연의 정은 나날이 뜨거워졌다.

읍에서 살고있는 혁명렬사유자녀 김귀옥의 집에서 집수리를 할 때 자주 찾아가 일일이 알아보고 적극 도와나선 일이며 영예군인들의 결혼상을 친부모의 심정으로 성의껏 차려준 사실,영예군인가정들에 텔레비죤수상기와 록화기를 비롯한 생활필수품들,치료기구를 마련해준것을 비롯하여 김선영동무가 군안의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을 위해 정을 기울인 이야기들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김선영동무의 진정에 넘친 성의를 알게 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를 친딸처럼,친누이처럼 여기면서 고맙다는 말을 곱씹군 한다.그럴 때마다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을 끝없이 위해주는 어머니당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당을 따라 한길을 가자고 고무해주는 김선영동무이다.

그뿐이 아니다.

김선영동무는 딸 송화를 조국보위초소에 어엿하게 내세우고 인민군군인들을 물심량면으로 도와나섰다.

축구공과 배구공을 비롯한 체육기재들을 마련하여 군인들에게 보내준 일이며 뭐니뭐니해도 군인들이 건강해야 한다고 하면서 보약과 자기가 집에서 기르던 닭과 토끼로 곰을 만들어보내준 이야기,휴가온 인민군군관들의 결혼식을 위해 지성을 바치던 일…

그가 우리 당의 후대사랑,미래사랑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고 만경대혁명학원을 비롯한 혁명학원원아들과 길주초등학원 원아들을 극진히 대해준 이야기는 또 얼마나 가슴뜨거운것인가.

혁명학원원아들이 방학으로 집으로 돌아올 때면 김선영동무는 친자식을 만나는 심정으로 그들을 반겨주고 학습과 조직생활을 잘해나가도록 고무도 해주었으며 군에 있는 초등학원에도 찾아가 원아들의 생활을 보살펴주군 하였다.

군안의 혁명렬사유가족들과 영예군인들의 생활을 돌보아주면서도 바치는 마음이 모자라는것만 같아 사회와 집단을 위한 일을 날마다 찾아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우리 선영이》,《우리 책임자》,《우리 누이》라고 정답게 부른다.

대중의 진실하고 값높은 평가-《우리》! 이것은 김선영동무와 같이 언제나 당과 숨결을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만이 받을수 있는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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