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31일

열렬한 애국으로 빛나는 한생

우리는 얼마전 열렬한 애국자이신 리보익녀사의 탄생기념일을 맞으며 사동구역 오류리에 자리잡고있는 오류혁명사적지를 찾았다.

나지막한 언덕아래 정갈하게 꾸려진 혁명사적지가 한눈에 안겨왔다.

소나무,잣나무,살구나무를 배경으로 나지막한 초가집이 있었다.

경건한 마음을 안고 열려진 사립문으로 뜨락에 들어선 우리는 리보익녀사께서 한생토록 안고 사신 애국의 세계속에 휩싸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리보익녀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시였다.

《할머니는 마음속깊은 곳에 꿈을 묻어두고 살았습니다.말하자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값있게 살았습니다. 》

리보익녀사께서는 1876년 5월 31일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리의 가난한 소작농가에서 탄생하시였다.

슬하에 많은 자손들을 두신 녀사께서는 그분들모두를 혁명의 길에 내세우시였고 김보현선생님과 함께 온갖 고초를 다 이겨내시면서 혁명가의 어머니,혁명가의 할머니로 한생을 빛내이시였다.

주체15(1926)년 여름이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송의 양지촌에 있는 묘소를 찾으신 리보익녀사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 크나큰 기대와 믿음을 담아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증손아,이제는 아버지가 메고있던 짐을 네가 메야겠구나.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어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나나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해도 좋으니 조선을 독립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거라.》

리보익녀사께서는 그렇듯 힘들게 공부시킨 아드님을 자신의 곁에 두신것이 아니라 나라찾는 위업에 내세우시였다.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맹활동을 하시던 아드님이 이역땅에서 세상을 떠나시였을 때에도 녀사께서는 결코 슬픔에만 잠겨계신것이 아니라 손자분을 또다시 그길로 떠미신것이다.애국의 높은 뜻이 맥박치는 할머님의 말씀에서 큰 충동을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독립과 같은 중대사에 대한 부탁을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안으시였다.

조선의 독립은 바로 열렬한 애국자이신 리보익녀사께서 품고계신 간절한 념원이였다.조선의 독립을 기다리며 그 독립을 위해 싸우는 자손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의 뒤바라지를 성실하게 해주는것이 녀사의 락이였다.

리보익녀사께서는 손자분께서 조선의 독립을 기어이 안아오리라는것을 굳게 믿으시였기에 그토록 강의한 성품을 지니실수 있었다.가난하고 불행하고 선량한 사람들에게는 그지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웠지만 원쑤들에게는 추상같이 무서웠으며 그 어떤 강권이나 불의앞에서도 휘여들지 않으신 녀사이시였다.

리보익녀사께서 혜산사건이후 일제의 악랄한 《귀순공작》에 의해 만주산야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 겪으시면서도 절개와 지조를 굽히지 않으신것은 그렇듯 강의하고 견결한 혁명정신을 지니고계시였기때문이다.

그때 말이나 돈으로는 만경대집안사람들을 《귀순공작》에 인입시킬수 없다는것을 알게 된 적들은 강압의 방법으로 리보익녀사를 만주로 데리고 떠났다.그렇게 되자 녀사께서는 좋다,너희들이 억지로 날 데리고가겠거든 가자,그렇다고 너희들을 도와줄줄 아느냐,그대신 나는 나대로 이 기회에 손자가 싸우고있는 백두산과 만주의 산천이나 실컷 돌아보겠으니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고 말씀하시였다.

적들이 1년가까이 서간도의 산악지방으로 다니며 고생시켰지만 녀사께서는 힘들어도 내 손자가 싸우고있는 산천을 보니 기운이 솟는다고 하시였다.

적들이 손자의 이름을 부르라고 강요할 때마다 녀사께서는 매번 나는 그런 미친 소리는 할줄 모른다,네놈들이 나를 죽이고 무사할줄 아느냐,우리 손자의 총알을 받고싶거든 어디 네놈들 하고싶은대로 해보라고 맞받아 위협하군 하시였다.하여 놈들이 녀사의 비위를 맞추느라 쩔쩔매며 바삐 돌아치게 하시였다.

설명절때에 있은 일이다.

《귀순공작반》을 맡은 일본인독찰관놈은 특무들에게 김장군 할머니에게서 설인사를 받고싶은데 그 늙은이더러 와서 세배를 하게 하라고 줴쳤다.그 말을 전달받은 리보익녀사께서는 쓴웃음을 지으시며 세상에 별소릴 다 듣는구나,버릇없는 놈! 그놈더러 와서 김장군 할미한테 세배를 하라구 해라!라고 불호령을 내리시였다.독찰관이라는 놈은 어찌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손에 들고있던 술잔까지 떨구었다.그놈은 수틀리면 흉기부터 뽑아들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빌 때까지 야료를 부리는 독종이였지만 그날만은 기가 꺾이여 아무 행패질도 못하고 과시 김일성장군의 할머니가 다르긴 다르다고,손자가 백두산의 호랑이라더니 그도 역시 할미호랑이가 틀림없다고 감탄하였다.

그후 일제의 강요로 또다시 만주땅을 밟으시였을 때에도 리보익녀사께서는 항일유격대가 싸움에서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으실 때마다 누가 곁에서 듣건말건 조금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내 손자가 장하다! 어서 왜놈들을 다 잡아치우고 우리 나라 땅에서 왜놈들의 씨를 말려라!》라고 기세를 올리군 하시였다.

리보익녀사께서 그때 남기신 자욱은 오늘도 만주의 산야에 점점이 찍혀있다.

일제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였던 시기 리보익녀사께서 총 한자루 없는 로인의 몸으로 적들의 강권과 위협에 휘여들지 않고 존엄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내실수 있은 비결은 드놀지 않는 신념에 있었다.

리보익녀사께서는 직업적인 혁명가도 아니고 학교를 다닌적도 없었다.조직적인 교양을 받은 일도 없는분이시였다.

하지만 우리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조선혁명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간직하고계시였기에 리보익녀사께서는 원쑤들의 그 어떤 박해와 고초,모진 시련과 난관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적들과 그처럼 당당히 맞설수 있었으며 마침내 해방의 날을 맞으실수 있었던것이다.

해방후 만경대고향집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을 부둥켜안으시고 아버지,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쓴다더냐라고 하시며 눈물지으시던분,끌끌하던 자손들이 조국해방의 날을 보지 못하고 한줌 흙이 되여 낯설은 이국땅에 묻히였으니 리보익녀사의 쓰리고 아팠던 심정을 어떻게 다 형언할수 있으랴.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20년만에 고향집에 오면서도 할아버지,할머니앞에 빈손으로 왔다고 말씀드리자 녀사께서는 왜 빈손이란 말이냐,독립이 얼마나 큰 선물이냐! 네가 성한 몸으로 해방을 안고왔으니 나는 그이상 더 바랄게 없다,네가 크고 해방이 크지 세상에 더 큰게 뭣이 있겠니라고 호방하게 말씀하시였다.이렇듯 녀사께서는 쓰라린 아픔,겪으신 고생은 한가슴에 다 묻어두시고 나라의 해방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가장 크고 귀중한것으로 여기신 열렬한 애국자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당과 국가건설이 끝난 다음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가까이에 데려다모시려고 하시였다.

그러나 그분들은 자손들의 덕으로 호강하는것을 바라지 않으시였다.어디까지나 수수한 평백성으로 살아가려고 하시였다.그래서 생의 말년까지 농사일을 계속하시였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이니라.》,이것이 리보익녀사의 인생철학이기도 하였다.녀사께서는 간혹 손자분께서 살림에 보탬을 주시려고 하면 자기 걱정을 안해도 되니 백성들걱정이나 하라고 사양하군 하시였다.

그 어떤 특혜나 특전을 바라지 않으시고 끝없는 헌신과 열렬한 애국의 넋으로 심장을 불태우신 리보익녀사의 한평생은 우리 군대와 인민의 심장마다에 자기 수령,자기 혁명위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만 있으면 두려울것도 없고 못해낼 일도 없다는 애국의 진리를 뜨겁게 새겨주고있다.

열렬한 애국으로 값높은 한생을 수놓으신 리보익녀사의 모습은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소중히 새겨져있다.

조국의 강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그처럼 바라시던 리보익녀사의 념원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높이 모시여 이 땅우에 찬란한 현실로 펼쳐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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