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4일

언제나 백두산을 안고 사는 전쟁로병화가

82살,

사람들은 아마 고령의 그 나이에,그것도 한쪽다리를 잃은 불편한 몸으로 고도의 정신력과 피타는 사색,왕성한 정력을 요구하는 미술창작의 세계를 질주하는 전쟁로병화가가 있다고 하면 선뜻 믿지 못할것이다.

백발을 이기게 하는 힘,무한한 창조의 열정을 낳게 하는 샘줄기는 과연 무엇일가.호기심을 안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찾은 우리앞에 하나의 큰 화폭이 펼쳐졌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백두산은 민족의 넋이 깃든 조선의 상징이며 우리 혁명의 뿌리가 내린 혁명의 성산입니다.》

금시라도 따웅소리를 지르며 화판밖으로 뛰쳐나올것만 같은 호랑이,무섭게 태질하는 백두의 칼바람속에서도 앞발을 뻗친채 사납게 노려보는 도고한 기상…

백두의 혁명정신,백두의 칼바람정신으로 살며 투쟁할데 대한 경애하는 원수님의 올해신년사의 전투적호소를 받아안고 흥분된 마음을 금할수 없어 화판우에 붓을 달리기 시작했다는 그는 중구역 련화2동에 사는 리률선화가였다.

얼마전에는 또 한분의 백두산장군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 백두산을 찾으셨다는 격동적인 소식에 접하고보니 낮이나 밤이나 이 화판앞에서 떠나고싶지 않다고,어떻게 하나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백두의 혁명정신,백두의 칼바람정신이 펄펄 살아숨쉬는 명작으로 완성할 생각뿐이라고 화가는 열정에 넘쳐 말하였다.

백두산과 전쟁로병화가,

알고보니 백두산에 대한 그의 사랑의 감정은 어제오늘에 시작된것이 아니였다.

《사람들은 흔히 날보고 백두산호랑이화가라고들 합니다.아마도 내가 나이 80이 지나도록 여직 화판곁을 떠나지 못하고 창작에 몰두하고있는것도 백두산이 안겨주는 열정과 락관때문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의 그림들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서 전쟁로병화가의 진정의 세계를 더 잘 알수 있었다.

작품들마다에 백두의 기상이 차고넘치였다.그가운데는 화폭의 길이가 3m를 훨씬 넘는것도 있었다.각이한 각도에서 각이한 형상으로 백두산의 억센 기상을 기묘한 화법으로 형상해낸 작품들은 바라볼수록 우리 마음을 백두산악의 정수리에 올려세워주었다.

추억을 더듬는 리률선화가의 이야기는 어느덧 해방전에로 거슬러올랐다.

황해북도의 어느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집에서 태여난 리률선화가의 유년시절은 눈물속에 흘러갔다.3살적부터 그림신동으로 불리운 그의 재간은 온 동리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마을에서 공연된 극작품을 보고 창호지에 극의 여러 장면을 순식간에 그려놓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나라잃은 그 세월에는 남다른 재간이 오히려 화가 되여 사방에서 부자들의 뭇매를 맞기가 일쑤였다.게다가 모진 세상에서 일찍 아버지까지 여의였다.그러한 때에 제일 큰 힘이 된것은 백두산에서 들려오는 항일유격대의 투쟁소식이였다.

삼천리강토에 백두산호랑이로 소문이 자자한 항일빨찌산 김대장에 대한 이야기는 남달리 감수성이 빠른 그의 예술적령감에 불을 지펴주군 하였다.망국노의 설음은 컸어도 백두산만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도 힘이 솟고 희망이 부풀군 하였다.

백두산호랑이,백두산장수를 칭송하는 화가가 되리라.

그렇게 소리없이 축적되여온 감정은 드디여 해방의 봄을 맞아 용암처럼 터져올랐다.

누가 시킨 사람은 없었지만 리률선은 영명하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한없는 경모의 정을 담은 그림을 그려 해방을 맞이한 고향사람들의 기쁨을 더해주었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 떨쳐나선 마을어른들을 도와 벽보도 쓰고 글도 쓰면서 선동사업에 열정을 바치던 리률선은 조국땅 남반부에 둥지를 튼 야수의 무리들인 미제가 시시각각 전쟁의 불구름을 몰아온다는 소식에 접하고 용약 붓을 쥐였던 손에 총을 틀어쥐고 조국보위초소에 섰다.조국이 있어야 청춘의 희망도 재능도 꽃피울수 있다는것이 그 시절 률선의 마음속생각이였다.

그후 가렬한 전화의 나날 그는 해방직후에 그렸던 소중한 그 그림을 심장깊이 새겨안고 전선천리를 종횡무진하며 용맹을 떨치였다.인천의 처절한 싸움판에도 용감하게 뛰여들면서 죽음도 두렴없이 조국을 지켜싸우던 그에게서 원쑤들은 한쪽다리를 앗아갔다.

이대로 주저앉느냐,또다시 일어서 미제와의 판가리결전을 치르느냐.

운명의 갈림길에서 그를 불사신처럼 일떠세운것은 어릴적부터 마음속에 안고 산 백두산이였다.

-나의 마음속에는 백두산이 있다.나에게서 원쑤들이 한쪽다리를 빼앗아갔지만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만을 굳게 믿고따르는 나의 심장의 불길,열정의 불길만은 빼앗지 못한다.

이런 불굴의 신념을 안고 그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도 굴함없이 이어나갔고 그후 전선천리를 달리며 원쑤를 무찌르던 병사의 주소를 미술창작이라는 또 다른 좌지에 정하게 되였다.

전상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속에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수령이자 조국이라는 숭엄한 감정의 바다에 붓을 적셔가며 미술수업과 창작에 전념하였다.

미술,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인 세계였다.어릴적에 그저 보고 느낀것을 그대로 옮기던 그런 단순한 세계가 아니였다.혁명이라는 크나큰 세계에서 보고 대하는 미술의 세계,수령을 알고 인민과 숨결을 함께 하며 창작하는 그림 한편한편은 황금보다 더 귀중한 재보였고 버릴수 없는 넋이였고 힘이였다.그가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포화속에서 발휘되는 영웅적희생정신을 반영한 작품을 출품할수 있은것도 언제나 당과 수령,조국과 인민에 대한 불타는 충정과 사랑의 마음을 안고 시대의 숨결에 심장의 박동을 맞추며 살려는 투철한 신념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수령형상미술작품창작이였다.

조선화 《홍두산전투를 지휘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현실을 보고 그려야 좋은 그림을 그릴수 있소》,《몸소 창광거리건설현장을 찾으시여》,《봄을 맞는 청산리》,《해방된 새 조국건설의 휘황한 앞길을 밝혀주시는 위대한 수령님》,《병사들의 생활을 보살펴주시는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 등 그가 교단에서,학생들을 이끌고나간 실습지에서 제자들과 함께 창작한 수령형상미술작품들은 지금도 주체미술사를 장식하는 걸작들로 빛을 뿌리고있다.

그 그림들은 그대로 백두산에 대한 사랑을 용암처럼 더욱 뜨겁게 분출시켜온 잊지 못할 성장의 자욱자욱이였다.

리률선화가는 한생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미술창작을 하였다.미술창작을 전업으로 하는 전문미술가로도 될수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체득한 백두산에 대한 사랑,수령과 조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제자들의 심장속에 소중히 새겨주고싶었다.

미술가가 되기 전에 혁명가가 되여야 한다는것이 교육자로서의 그의 신조였다.

리률선의 제자들가운데는 주체미술사에 혁혁한 자욱을 새긴 김일성상계관인,2중로력영웅,인민예술가,공훈예술가,교수,박사 등이 수없이 많다.제자들이 떨친 명성에 비해볼 때 리률선이라는 이름은 그리 높게 울리지는 못하였다.그의 작품들도 제자들의 작품보다 수적으로 많지 못하다.

그러나 어머니 우리 당에서는 교육과 창조라는 헌신의 두 세계에서 보통인간의 생의 두배라고 할만큼 배가의 노력을 기울이며 피타게 헌신해온 그의 삶을 시대와 인민이 알도록 높이 내세워주었다.

여러 조선화참고서들을 집필하여 내놓을 때마다,조선화 《간석지의 개간》,《진펄길을 헤치고》,《지성》,《100만톤 증산》,《출항》,《항쟁의 불길》 등 품위있는 작품들을 내놓을 때마다 당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주었으며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영광의 기념촬영도 하도록 하여주었고 인민예술가로도 내세워주었다.하지만 그는 만족을 모른다.

교단을 내린지도 벌써 몇년째…

쌓은 공적만으로도 여생을 편히 보낼수 있지만 그는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늘 말하며 붓을 들고있다.

오늘은 백두산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그림을 그렸다면 래일은 또 백두의 칼바람정신이 맥동치는 미래과학자거리건설장을 비롯한 들끓는 현실을 담은 명화들을 계속 내놓을 결심이다.한 전쟁로병화가의 삶은 우리에게 말하고있다.

누구나 어디서나 백두산을 안고 살라.언제나 수령의 세계,애국의 세계를 안고 살 때 심장은 커지고 조국을 받드는 애국의 숨결도 뜨거워질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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