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한생은 위대한 수령님을 위한 한생,혁명동지들을 위한 한생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지니신 남다른 인정미에 대하여 추억하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쓰신 가슴뜨거운 사연들이 오늘도 우리모두의 심장을 울린다.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에는 자신께서 산에서 여러해동안 입고 다니시던 솜외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그 솜외투는 김정숙동지께서 지어드린것이였다.
언제인가 김정숙동지께서는 총알이 명주솜을 뚫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였다.
그때부터 김정숙동지께서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명주솜을 한줌두줌 모으시였다.전투와 행군길에서도 그리고 마을에 잠간 들렸다 가시는 길에서도 명주솜만은 잊지 않으시였다.
이렇게 마련하신 명주솜으로 김정숙동지께서는 외투를 만드는데 온 심혈을 쏟아부으시였다.밤에도 쉬지 못하고 한뜸두뜸 정성을 다하여 드디여 외투가 완성되였을 때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시였던가.
명주솜외투는 위대한 수령님께 꼭 맞았다.김정숙동지께서는 기쁨을 금치 못하시며 밝게 웃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일을 늘 잊지 못하시며 숙영지에서 밤을 새거나 잠을 잘 때면 그 명주솜외투를 덮군 하였는데 몸이 훈훈하였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위하시는 김정숙동지의 지성은 격전장에서 날아오는 총알도 막아주고 한겨울의 사나운 추위도 막아주었다.
김정숙동지께서 도천리에서 지하공작을 마치고 떠나실 때 있은 일이다.
김정숙동지와 깊은 정을 맺은 그곳 사람들은 섭섭함을 금치 못하며 멀리까지 따라나섰다.그가운데서도 한 부녀회원은 김정숙동지께서 포대산을 넘을 때까지도 그냥 따라오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김정숙동지께서 어서 돌아가라고 몇번이나 이르시였지만 막무가내였다.헤여지기에 앞서 김정숙동지께서는 자신의 은가락지를 부녀회원에게 끼워주시고 그가 띠고있던 빨간 허리띠를 풀어 자신의 허리에 띠시였다.
털실로 뜬 그 빨간 허리띠로 말하면 그 부녀회원이 김정숙동지의 보증으로 부녀회에 가입하는 날 기념으로 떠서 자랑삼아 띠고다니던 소중한 치장품이였다.
그때 김정숙동지께서는 이 빨간 띠가 다 해여져서 마지막 실 한오리가 남을 때까지 품고다니며 정든 도천리사람들을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였다.그 약속대로 김정숙동지께서는 부대에 돌아와서도 늘 군복안에 그 빨간 털실허리띠를 띠고 지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그 띠와 함께 김정숙동무는 늘 인민의 체온을 자기 몸에 간직하고 살았다고,그의 넋은 언제나 인민에게서 떠나본적이 없었다고 뜨겁게 회고하시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 김정숙동지께는 무척 애용하시던 한장의 모포가 있었다.준엄한 혈전장에서 김정숙동지의 배낭에는 언제나 그 모포가 얹혀있었다.사람보다 배낭이 더 커서 누구인지 가려보기 힘들 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포를 보시고 김정숙동지를 제꺽 알아보군 하시였다.
어느날 한 나어린 녀대원과 헤여지게 되였을 때 김정숙동지께서는 서슴없이 모포를 그에게 주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자,기념으로 가지고 가거라,새것은 아니지만 너를 친동생처럼 사랑해온 이 언니의 온기가 스며있다는걸 잊지 말아달라고 하시며 녀대원의 배낭에 그 모포를 차곡차곡 포개여 넣어주시였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반세기이상의 기나긴 세월이 흘러간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연깊은 그 모포를 다시 보게 되시였다.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여 위대한 수령님을 뵙게 된 그 녀대원이 모포를 수령님께 삼가 올리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감동깊은 사연에 대하여 돌이켜보시면서 회고록에 이렇게 쓰시였다.
그는 늘 받는 재미보다 주는 재미가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남들의 정을 받는것도 좋지만 남들에게 자기 정을 줄 때가 훨씬 더 좋다는것이 바로 김정숙의 인생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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