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1일

허용에 대한 생각

지난 8일 온 나라 사람들의 첫 일과는 꼭같이 어버이수령님을 찾아뵙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만수대언덕으로,수도의 여러곳에 모셔진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태양상으로 꽃의 물결이 굽이쳐흘러갔다.20년전 7월,피눈물의 나날에 어버이수령님께서 몸소 가꾸시던 포도를 받아안고 그이의 동상앞에서 목놓아울던 어제날의 유치원생들이 어엿한 청년이 되여 그이앞에 섰다.그 나날에 어른들과 나란히 호상을 섰던 아이들이 아버지,어머니가 되여 자식들과 함께 그이께 인사를 드리였다.

기발대에 끝까지 오르지 못한 공화국기를 보니 더욱 가슴에 사무쳤다.

우리 정녕 어버이수령님을 잃고 스무해를 살아왔단 말인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언제나와 같이 웃으시며 우리를 반겨맞아주시였다.이 나라의 아들딸들이 드리는 꽃송이들을 정깊게 받아주시였다.

그이를 만나뵙고 일터로 떠났던 사람들의 걸음은 또다시 퇴근길에도 수령님계시는 곳으로 향해졌다.밤이 깊도록 꽃매대의 불빛은 꺼질줄 몰랐다.

그이의 축복을 안고 만수대언덕을 내려 수도의 거리를 따라걷느라니 평양학생소년궁전의 불빛이 여느때없이 가슴을 파고들었다.이제 평양에 소년궁전을 크게 짓자고 한다고,소년궁전을 설계할 때에는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크고 화려하게 설계하라고 하시던 우리 수령님의 말씀이 메아리되여 울려왔다.

50여년전 그날의 말씀은 저택설계도를 세번째로 부결하시면서 우리 수령님께서 설계일군들에게 하시였던 말씀이다.

인민들이 반토굴집에서 다 나와 지상건물에서 살게 될 때 우리도 지상건물을 짓고 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전쟁이 끝난 이듬해 설날도 반토굴집에서 맞으신 우리 수령님이시였다.그이께 새 저택을 지어드리려던 일군들의 소원은 평양시에 륜환선거리가 형성되고 인민들의 집들이가 한창이던 그때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되였다.

하지만 첫번째도,두번째 저택설계도도 그이께 합격되지 못하였다.대폭 축소한 세번째 설계도도 그이께서는 부결하시였다.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우리들에게는 크고 화려한 집보다 소박하고 아담한 집이 더 좋다고 하시며 그이께서는 너무도 협소한 세번째 저택설계도마저 개작하도록 하시였다.

그이는 자신과 인민을 분리하여보는것을 허용하지 않으시였다.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초과하는것을 단 한치도 허용하지 않으신 우리 수령님이시였기에 해방후 겨울에도 사무실에 군불을 때는것마저 불허하시고 산에서 싸우실 때처럼 외투를 걸치시고 새벽일을 보군 하시였다.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금수산의사당(당시)의 터갈라진 구내도로를 걸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그리움 간절해질수록 아름다운 수도의 가로수 한그루,집집의 창가마다에 넘치는 불빛이 정녕 무심치 않았다.

한평생 험한 길을 걸으시여 좋은 날만 펼쳐주신 수령님의 그 로고의 자욱자욱우에서 인민의 행복이 만발한것 아니던가.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도 허용하지 않으시였지만 인민들과 후대들을 위해서는 억만금의 지출도 기쁘게 허용하신 우리 수령님!

그이께서 자신을 위해 허용하신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불편과 고생이였고 초과되는 일감뿐이였다.인민을 위한 그 길에서 한치도 허용하지 않으신것은 인민의 불편과 고생이였다.

수령님 맡기고가신 인민을 더 잘살게 해주시려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걸으신 이민위천의 길을 쉬임없이 이어가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을 우러를수록 생각이 깊어진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한평생 허용하신것과 허용하지 않으신것,그것은 그대로 위대한 장군님의 생활준칙이였고 오늘은 우리 원수님의 생활준칙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민들과 후대들이 누려온 복락밑에는 바로 이 위대한 생활준칙이 뿌리처럼 내려있다.

수령님 생각으로 잠 못든 7월 8일의 밤은 사람들의 심장마다에 깊이깊이 새겨주었다.

허용이라는 두 글자에도 무겁게 실려있는 우리 수령님의 애민의 세계,헌신의 세계에 대하여…

댓글 없음:

댓글 쓰기